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이애나 스펜서 (문단 편집) == 전 세계의 추모 물결 == ||{{{#!wiki style="margin: -6px -10px" [youtube(mBAeL6nTkBY, height=280)]}}}|| >''' "나의 누나라고 부를 수 있어 자랑스러웠던, 한 여인의 삶에 감사를 표합니다. ''' >'''독특하고 복잡하고 특별하고 유일무이했던 다이애나. ''' >'''내적, 외적으로 모두 아름다웠던 그녀를 우리는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Above all we give thanks for the life of a woman I am so proud to be able to call my sister, the unique, the complex, the extraordinary and irreplaceable Diana whose beauty, both internal and external, will never be extinguished from our minds."''' >---- >남동생이자 현 제9대 스펜서 백작 찰스 스펜서, 다이애나의 장례식 때 읽은 추도사의 마지막 부분. 다이애나의 갑작스러운 사고사는 세계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특히 다이애나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대단했던 '''영국 국민들의 상실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영국 국민들 한 명 한 명 모두 다이애나를 정말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했다. 다이애나의 행보는 왕실에 대한 거부감이나 반발이 강했던 [[노동자]] 계층이나 [[서민]] 계층, 심지어 [[공화주의|공화주의자]] 계층에게도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https://youtu.be/p0qMxFY29WA|당시 영상]][* 이 영상은 역사상 최초의 [[리액션 비디오]]라고 부르기도 한다(1997년에는 해당 용어가 존재하지도 않았지만). 영상을 찍고 있는 인물은 친구들과 [[우노]] 카드게임을 하는 중 새로 산 [[캠코더]]가 잘 되는지 테스트중이었으며 어머니로부터 다이애나의 교통사고 소식을 접해 TV를 틀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해당 영상을 보면 다이애나가 차사고로 심각하게 부상당했다는 말이 나왔을 때는 오히려 괜찮을 거라고 웃어넘기는 반응이었지만, 그녀의 부고를 전해듣자마자 전부 경악을 넘어 충격으로 할말을 잃고 뉴스만 봤으며 영상 속 기자도 울음을 참느라 울먹이고 있다. 당시 영국인 상당수의 반응이 이랬다. > '''[[엘리자베스 2세|여왕 폐하]], 당신이 그녀의 죽음에 마음 아파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Show us your care!)''' >---- >익스프레스 >'''우리의 여왕 폐하는 어디 가신 것인가? 폐하의 조기는 도대체 어디 있는가?(Where is our queen? Where is her flag?)''' >---- >[[더 선]] > '''군중이 [[反]]왕정으로 돌아서고 있다.(The mood is turning anti-Royal.)''' >---- >[[인디펜던트]] > '''여왕은 우리처럼 애도를 표하기 위해 나와야 한다.(The Queen should be here to show her respect, like US.)''' > '''마지막까지 모욕. 어딜 가든 조기가 게양되어 있다... 버킹엄 궁전만 빼고.(The final Insult. Everywhere you look there are flagpoles with flags at half mast... Except Buckingham palace.)''' >---- >영국 왕실의 미지근한 반응에 분노한 영국 언론의 헤드라인 다이애나에 대한 국민적인 추모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다이애나의 죽음을 애도하는 꽃다발이 생전에 거주하던 [[켄싱턴 궁전]] 앞에 쌓이기 시작했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Flowers_for_Princess_Diana's_Funeral.jpg|width=100%]]}}}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4.bp.blogspot.com/img_19.jpg|width=100%]]}}} || ||<-2> '''{{{#fff 켄싱턴 궁전 정문 앞에 쌓인 '''다이애나를 추모하는 꽃다발들'''}}}''' || 그리고 엘리자베스 2세가 머물던 [[버킹엄 궁전]] 앞에도 다이애나의 죽음에 대한 '''애도와 항의의 표시'''로 꽃다발이 쌓여갔다. 그렇지만 왕실은 찰스 왕세자와 이혼하여 왕실을 떠난 다이애나의 죽음에 쌀쌀맞은 태도로 일관했다.[* '어떠한 행동을 해야 할지 몰랐다'가 맞을 것이다. 왕위 계승 서열 순위 1위인 왕세자가 왕세자비와 이혼한 사실도 흔한 상황이 아닌데다, 이혼한 뒤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였으니 왕실은 전례 없는 상황에서 장례를 치러야 했다. 여러가지로 예법상 문제가 되는 부분들이 있었는데, 가령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다이애나의 운구가 지나갈 때 고개를 숙여 인사한 것도 엄밀히 말하면 예법에 어긋난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국민 정서상, '''여왕이 그런 부분에서까지 예법을 지켰다면 오늘날 영국에 왕실은 남아 있지 않았을 수도 있다.'''][* 게다가 여왕은 당시 살아있던 어머니인 '퀸 마더'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에게 참석하지 말 것을 주문받았던 데다 그녀의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s-5.2|이혼녀 증오의 역사는 유명한데]], 반면 그녀의 딸 [[마거릿 로즈|마거릿 공주]]와 외손자 [[찰스 3세]]와 [[앤 공주]]는 예외라는 것에서 [[내로남불]] 소리를 들었다. 여왕 본인도 인기가 많던 며느리를 견제했고 찰스를 말리기는 커녕 카밀라를 마음에 들어했기에 중재를 요청했던 다이애나를 겉으로만 들어주는 척 했고 사실상 방관했었다. 이 때문에 더욱 더 어쩔 줄 몰랐을 듯. 이런 상황에서 다이애나를 감싸준 사람이 바로 시아버지 [[필립 마운트배튼|필립 공]]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다이애나의 사망 소식이 알려졌을 때 시신과 장례 수습을 가장 앞장서서 주관한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니고 생전에 불화가 가장 심했던 전 남편 '''찰스'''였다. 다이애나의 사망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여왕을 비롯한 왕실 일원 모두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면서 평소처럼 교회로 나가는 일정을 수행한 반면에 찰스만 왕실 일원들 가운데 직접 다이애나의 시신이 안치되어있던 프랑스 파리로 곧장 날아가 시신 수습을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고 심지어 이 과정에서 여왕과 찰스 모자가 서로 의견이 갈렸던 탓에 언쟁까지 벌어졌지만 어찌되었든 찰스의 의견이 최종적으로 관철되기는 했다. 다만 [[윌리엄 아서 필립 루이|윌리엄]]과 [[해리 왕자|해리]]가 받을 충격을 생각해서 이 둘은 데리고 가지 않는 것에는 동의했다고 한다. 정작 어린 [[해리 왕자|해리]]는 어머니의 마지막을 확인하러 아버지와 같이 파리에 가고 싶어했다고. 찰스는 다이애나의 언니들과 함께 파리로 가서 시신을 확인하고 [[런던]]으로 운구하는데 진두지휘했으며, 비록 이혼했지만 한때 자신의 아내이자 왕세자비였던 다이애나에 대한 마지막 예우를 하고 싶었는지 기존의 관례를 깨고 왕실 문양이 새겨진 깃발로 관을 덮은 채 파리 병원에서 시신을 운구하도록 지시하였다.] 사고 발생 당시 스코틀랜드 벨모럴 성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던 여왕과 왕실은 왕실에서 나간 사람이니 그녀의 죽음은 스펜서 가문의 일이라며 무대응했고 스펜서 가문의 가족장으로 진행하려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오직 찰스만이 해당 대응에 크게 반발하며 웨일스의 공비로서 대접할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논란이 오가던 도중 왕실은 조기는 커녕 기존의 관례대로 여왕이 부재 중이라는 뜻으로 버킹엄 궁전의 왕실기를 게양하고 있지 않았다. 이러한 왕실의 반응은 영국 국민들의 매우 커다란 분노를 불러왔다. 왕실의 차가운 반응에 대해 엄청난 상실감을 느끼던 영국 국민들 사이에서는 왕실이 다이애나를 파국으로 몰아넣었다는 여론이 떠올랐다. 이로 인해 왕실에 대한 영국 국민의 분노는 이례적으로 극도로 커져갔으며, 당시 [[영국 총리]]였던 [[토니 블레어]]가 이례적으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 가서 "다이애나의 죽음을 왕실이 추모해줄 것"을 권유하며 여왕을 설득했다. 결국 왕실은 기존의 입장을 번복하여 다이애나의 장례식을 왕실장으로 치르고 전세계에 텔레비전으로 방영하도록 하였으며 1997년 9월 4일에는 다이애나 스펜서를 추모하는 대국민 메시지를 방영하였다.[* 이 사연을 [[엘리자베스 2세]]의 시각을 중심으로 다룬 영화가 2007년 개봉한 <[[더 퀸]]>이다.][* 엘리자베스 여왕 치세 동안 크리스마스 정기 메시지를 제외하고 대국민 연설을 진행한 것은 총 5번으로 1991년 걸프전, 1997년 다이애나 스펜서 사망, 2002년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사망, 2012년 다이아몬드 주빌리, 2020년 코로나 팬데믹때 진행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CTpcuXbJMcM)]}}} || || '''{{{#fff 1997년 9월 4일 BBC1에 방영된 엘리자베스 여왕의 대국민 메시지}}}''' || 당시 왕실에 대한 영국 국민들의 여론은 '''수백 년만에 최악을 찍었으며''', 왕정 폐지의 지지율이 사상 처음으로 50%에 육박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지금은 다시 10% 안팎으로 폭락했다.[* 시간이 지나며 불만이 사그라든 것도 있지만, 영국 왕실도 자신들의 씀씀이를 대폭 줄이는 등 지지율 회복을 위해 많이 노력하였다. 물론 태생 잘 태어나서 세금 먹는다는 논란은 끊이질 않지만, [[찰스 3세]]의 불륜녀인 [[카밀라 파커 보울스|카밀라 파커볼스]]도 반감을 어떻게든 줄이기 위해 책잡히지 않으려고 정말 처신에 노력한다. 하지만 아직도 다이애나를 기억하는 영국인들 사이에서는 '마녀'라고 불리며 찰스와 함께 왕실에서 제일 인기가 없다. 심지어 찰스가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사후 왕위를 계승하는 것에 반대하는 여론도 적지 않았었다.]그럼에도 영국인들은 아직도 다이애나의 비극적인 결혼 생활과 죽음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완전히 지우지 못하고 있다. 다이애나 비의 죽음을 기점으로 조금 더 개방적인 분위기로 왕실을 개편해 왕실 지지율을 올린 엘리자베스 2세에게는 '''영원히 씻을 수 없는 [[흑역사]]'''로 남게 되었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img.metro.co.uk/funeralAP_350x252.jpg|width=100%]]}}}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4.bp.blogspot.com/article-1347820-0CCC4F6E000005DC-607_634x457.jpg|width=100%]]}}} || ||<-2> '''{{{#fff (왼쪽 사진) 필립 마운트배튼, 윌리엄 왕자, 다이애나의 남동생인 스펜서 백작, 해리 왕자, 찰스 3세}}}''' || || {{{#!wiki style="margin: -6px -10px" [youtube(wdrRLTgavus, height=280)]}}}|| 다이애나의 왕실장 영상. 노래는 [[버니 토핀]]이 개사하여 [[엘튼 존]]이 부른 추모곡 [[Candle in the Wind 1997]]. 엘튼 존은 생전 다이애나 스펜서와 매우 절친한 사이였다. 당시 추모 방송에서 그는 이 노래를 [[피아노]]로 연주하며 부르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한국 역시 [[김영삼]] 대통령이 [[김용태(1936)|김용태]] 비서실장을 통해 [[https://news.kbs.co.kr/mobile/news/view.do?ncd=3777289|애도를 표시]]했고 [[주영한국대사관]]도 다이애나의 장례식에 조화를 보냈다. 다이애나의 장례식은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1997년 9월 6일 치러졌으며, 유해는 그녀의 친정이 있는 올소프에 안장되었다.[* 다이애나의 남동생인 스펜서 백작이 살고 있으며 일반인도 예약을 하면 들어가 둘러볼 수 있다. 7월에서 8월까지만 개장한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mobile.gannett-cdn.com/diana-tribute-4_3.jpg|width=100%]]}}}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i.dailymail.co.uk/article-0-0040078F00000258-720_468x452.jpg|width=100%]]}}} || ||<-2> '''{{{#fff 다이애나의 무덤}}}''' || 그로부터 14년이 흐른 2011년 4월 29일, 다이애나의 장남인 윌리엄 왕자는 어머니를 떠나보낸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약혼자 [[캐서린 미들턴]]과 결혼식을 올렸다. 세간의 해석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인생에서 가장 경사스러운 의식을 통해 극복하려고 한다"는 것이 지배적이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www.blogcdn.com/royal-engagement-ring-kate-middleton-princess-diana-590ac111610.jpg|width=100%]]}}} || ||<-2> '''{{{#fff (왼쪽)다이애나 & 찰스 3세의 약혼 반지 [br] (오른쪽)캐서린 미들턴 & 윌리엄 왕자가 물려받은 결혼 반지}}}''' || 우선 윌리엄이 언론에 결혼을 발표하면서 약혼자인 [[캐서린 미들턴]]의 손가락에 끼워준 [[사파이어]] 반지가 아버지 찰스가 어머니 다이애나에게 청혼하면서 주었던 약혼 반지였다. 이 반지는 원래 차남인 해리가 물려받았으나, 윌리엄은 청혼을 위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다이애나의 유품인 시계와 교환했다고 한다. 그리고 결혼식이 있기에 앞서 윌리엄은 올소프에 있는 어머니의 묘소에 캐서린과 함께 참배했다. 윌리엄과 캐서린의 결혼식 당일 강론한 리처드 샤트레스 주교는 다이애나의 10주기 추도식에서도 강론했으며, 다이애나의 장례식 때 추모곡을 열창한 가수 엘튼 존이 결혼식 하객으로 초청받았다. 또한 예식 때 부른 성가 <전능하신 주 하느님>은 다이애나의 장례식 때 불렸던 곡이기도 하다.[* Cwm Rhondda로도 알려져 있는 웨일스 민요가 원본이다.] 사고 현장이었던 퐁드랄마 지하도 위에는 다이애나를 추모하는 금빛 불꽃 모양의 조형물이 1999년에 세워졌다. 사람들은 윌리엄의 결혼식 날 여기에 꽃다발을 헌화하며 다이애나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마이클 잭슨]]이 HIStory World Tour를 진행할 때 다이애나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그날 예정되었던 공연을 취소하였다. 그리고 곧 진행된 투어를 다이애나에게 헌정한다는 의미로 '[[Heal the World]]'를 공연할 때 그녀의 사진을 3분간 게시하였으며, 추모의 의미로 'Gone Too Soon'을 불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